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제이슨 바커와의 대담 (2)

이 대담은 <한국일보>(2011년 9월 25일자)에 실린 대담의 확장판입니다. 지면에는 공간의 제약 때문에 분량이 대폭 축소된 채 실렸습니다. 원래의 대담 내용은 여기에 포스팅하는 것보다 더 길지만 제이슨 바커 감독의 대답을 중심으로 약간의 수정과 편집을 가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대담의 원본을 제공해주신 이윤주 기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맑스 유행이 허세일 수도 있지만 정치를 생각하게 한다면 문제 안 돼”
“유럽의 반세계화 운동도 맑스 영향, 신자유주의 시대엔 착취 개념도 달라져야”

애니메이션 다큐 <맑스 재장전>의 제이슨 바커 감독 인터뷰

<맑스 재장전>(2010)의 감독 제이슨 바커(39)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번역가・저술가로 활동하며 영화도 찍는데 본업은 이론가다. 영국에서 태어나 정치철학을 공부했고,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알랭 바디우를 사사해 카디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2002)은 영미권에 바디우 철학을 소개한 최초의 입문서로, 2009년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맑스 재장전>이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11년 9월 22~28일)에 초청돼 24일 한국을 찾은 바커를 만났다. 인터뷰에는 바커의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한국어판 해제를 쓴 철학자 서용순 씨가 함께 했다. 최근 한국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면서 5・18 관련 책을 구상 중이라는 서용순 씨 역시 바디우를 사사해 파리8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얼마 전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2010)을 번역했다.

























알랭 바디우의 책을 썼다. 바디우를 연구한 이유는 뭔가?
내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바디우였다. 당시 영어권 국가에서는 바디우가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 철학이 지금은 정체된 상태에 있는데 바디우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은 내게 무척 흥미로웠다. 일례로 유럽 철학은 언어나 문화처럼 미시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디우는 거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유를 한다. 원래 철학은 그래야 한다. 흥미롭고 급진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바디우를 공부하면서 당신의 사유가 바뀐 지점, 계기가 있다면?
바디우의 경우 스스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고 기여한 부분이 정치이다. 철학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전 세계가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어가는 와중에 바디우는 정치가 더 혁명적・급진적이 될 수 있다고, 철학이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 얼마 안 되는 용기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사건’은 바디우의 대표 개념이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에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게 뭔가?
사실 ‘사건’은 복잡한 개념이다. 바디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사건으로 본다. 하지만 사건은 드물다. 어디서, 언제 일어났는지 정의하기조차 힘들다. 최근의 사건이라면 세계경제 위기인데 바디우의 정의로는 사건이 아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지엽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보편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최근의 세계경제의 위기가 어떻게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영화 얘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출품작이 거의 그렇지만, <맑스 재장전>은 절대 대중적이지 않다. 그런데 첫 회는 매진이 됐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놀랐다. 어떻게 보면 한국이 흥미로운 국가이다. 서구의 나라들은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가 붕괴됐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핵 위기 이후의 세계 평화를 유지하자고 말들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런 시도들이 다 쓰레기라는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웃음) 이게 환상이고,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의 붕괴 운운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다. 몇몇 부분에서 영감도 얻었고. 내 생각이 확인되기도 하고……. 불만은 영화가 중간에서 끝난 느낌이라는 것? 현실에 대해, 그러니까 경제・금융・환경의 위기부터 상품물신성과 공산주의 등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너머’는 없다. 적어도 이런 객관적 현실을 넘어가려는 어떤 시도들이 가능한지는 언급해줘야 하지 않나. 그래서 궁금한데 혹시 속편이 있나? <맑스 레볼루션>?
사실 “바커는 입장이 없다”는 관람평을 많이 받긴 했다. 그런데 TV시스템 자체가 입장을 갖도록 허락해주질 않는다[<맑스 재장전>은 TV용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시스템 자체가 모든 걸 굉장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당장 뭘 하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방송국에서 그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질 않는다. 글쎄, <맑스 재장전>의 속편을 만든다면 확실히 <맑스 레볼루션>이 되어야 할 텐데, 가능할지 의문이다. (웃음) 혁명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사유를 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요즘에는 철학이 일종의 자조 혹은 위안거리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유한다는 건 쉬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유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활발히 생각하게 만드니까. 이런 사유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내 영화는 할 일을 다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서두에서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맑스주의가 주목받는다고 했다. 유럽에서는 상당히 유행처럼 나타났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실제로 그런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영화를 통해 이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맑스 자체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이념’(idea of communism)이 돌아온 것 같다. 공산주의가 시작되는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맑스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실제로 최근의 세계경제 위기 등이 촉발한 ‘맑스주의의 유행’은 맑스주의에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예컨대 지극히 정치적이지만 맑스와 전혀 상관없는 유토피아적 요소를 지닌 반세계화운동도 현재 유럽에서 유행 중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도 있는 듯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전의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 말이다. 아무튼 ‘맑스주의의 유행’은 정치적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움직임일 수도 있다. 따라서 다시 물어봐야 할 질문은 이렇다. 세계경제 위기와 맑스의 재장전이 우연인가? 정치적 필연성을 띠는 것인가?

한국에도 2008년 이후 맑스주의가 다시 관심받는 것 같다. 2006~07년 맑스 철학을 16번 가량 무료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늘 70~80명 정도가 들었다. 아무래도 작금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볼 때 참혹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는 싶은데 대안은 많지 않으니까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에게서 뭔가 단초를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접근방식은 유럽과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경제적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나 수단으로 맑스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유럽에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사회과학적 시선으로만 맑스주의를 보는 게 항상 반복된다. 거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바디우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받은 슬라보예 지젝도 <공산당 선언>의 맑스는 흔쾌히 언급한다. 그러나 맑스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한다.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본 것은 맑스가 할리우드 배우들과 나란히 서있는 포스터가 신문에 실린 애니메이션 장면이었다. 체 게바라의 혁명이 자본주의 시대에 티셔츠나 목걸이 디자인으로 변질됐듯이, 맑스주의 역시 이제는 하나의 패션이 된 것 같다. 그 점에서 지금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대중의 심리 기저에 일종의 지적・윤리적 허영심이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는 ‘강남 좌파’라는 표현이 있다. 유럽에도 ‘캐비어 좌파’라는 표현이 있지 않나?
프랑스 사람들은 철학이 너무 어렵거나 급진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밥 먹고 쉬면서 얘기할 수 있을 정도?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생각’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사람은 저럴꺼야”라는 식으로 빨리 판단해버리지 않는가. ‘강남 좌파’든 ‘캐비어 좌파’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건 우리가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맑스가 다시 유행하는 현상 역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허세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맑스 재장전>은 맑스의 여러 이론적 개념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여러 학자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당신은 맑스의 개념들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영화를 보면 지젝이 이런 지적을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정상적인 착취시스템에 머물게 해달라”는 요구만 한다는 지적. 맞는 말이다. 사실 이제는 노동시간에 의해서 착취가 정의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착취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우리는 TV를 볼 때도 착취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광고를 봄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착취 메커니즘에 들어가는 것일 수 있다. 실로 다양한 착취가 존재하는 것이다. 착취의 한계는 어디이고, 어디서 끝나는가? 이것은 민감한 질문이다.
국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맑스는 가까운 미래에 국가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완전히 민주화된 국가에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해를 대변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20세기에 겪은 경험은 이와 정반대였다. 정부가 아니라 일반적 통제의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어디에나 늘 존재하지 않는가?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국가 차원에서 통제되고 있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경우를 우리가 지금껏 사용했던 어휘로 사유할 수 있는가?

영화에 출연하는 학자 중에서 당신이 가장 동의하는 학자는?
다 중요하다. (웃음) 영화에 나오는 모든 학자가 영화를 통해 질문하고자 하는 가치 있는 대답을 했다. 그들의 작업을 하나 같이 모두 존중한다. 누구에게 더 동의한다거나, 누군가만이 답을 갖고 있고 진실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라면 현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는 빨간색 알약과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파란색 알약 중에 뭘 고를 건가?
빨간색 알약. (웃음) 그런데 사실 나는 니나 파워가 한 말에 동의한다.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인생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마지막 장면에 내가 이런 질문을 배치한 건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개인의 선택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이 동반돼야 한다. 오늘부터 뭔가를 하겠다고 해서 당장 뭔가가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이윤주 기자 |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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